서론
예배란 단순한 형식이나 의무를 넘어, 마음과 삶을 드리는 전인격적 헌신이다. 마태복음 26장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행위는 이러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신 시점, 베타니에서의 한 사건은 당시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깊은 영적 통찰과 헌신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매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이 여인의 행동은 낭비가 아닌, 주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태도와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유월절의 의미
1.수난 예고의 시간적 배경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맞아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명확히 예고하신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라” (마 26:2) 하신 이 말씀은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철저히 맞물린 의도적 선언이다. 예수님은 우연히 체포당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이라는 정해진 시점에 맞추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의 길로 나아가신 것이다.
2.유월절의 역사적·신학적 의미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를 바른 집이 죽음에서 벗어난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시작이었다. 이 절기에서 드려지는 어린 양은 예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실체이자 성취이다. 유월절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진정한 희생 제물이 되신다.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반면, 그 시각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3.마태복음 26:3–4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가야 바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죽일 계략을 세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민란을 염려하며 명절에는 이를 실행하지 않으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의 계산을 넘어서 실행된다.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계획 충돌 인간은 명절을 피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유월절에 맞춰 이루어진다. 이 대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속사의 정확성을 드러낸다.
4.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바로 그 시점에 죽으셔야 했고, 이는 수천 년 전 유월절 사건과 완벽히 연결되는 구원의 완성이다. 인간의 악한 의도마저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도구로 사용되는 신비와 섭리가 이 본문에 담겨 있다. 오늘날 유월절의 영적 의미 예수님의 수난과 유월절의 관계를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으며, 그의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유월절은 단지 유대인의 절기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참된 자유의 시작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과 영원한 기억
1.역사의 한순간,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 사건 마태복음 26장 6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둔 긴박한 시간 속에서 일어난, 짧지만 깊은 의미를 지닌 사건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이 베다 너에서 식사하시던 중, 한 여인이 매우 값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다. 당시 사람들, 특히 제자들은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비"라고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이 행위를 높이 평가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 여인의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예배와 헌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2.사람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 차이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9)라는 말은 겉보기에 합리적이고 선한 주장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이해 부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는 허비로 보이는 그 헌신을 "좋은 일"로 평가하셨다(마 26:10). 이는 진정한 예배와 헌신이 반드시 세상의 기준이나 계산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3.하나님은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시며,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예언적 행위 예수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서 함이라"(마 26:12)고 하심으로써, 이 여인의 행동을 단순한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장차 있을 자기 죽음과 연결된 영적 행위로 해석하셨다. 당시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여인은 무의식중에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언적 행위를 행한 것이다. 이는 예배가 단지 과거의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앞서 동참하는 통찰력 있는 행위임을 의미한다.
4.복음과 함께 전해질 영원한 기억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3)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 여인의 헌신이 단지 한 순간의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장소와 시대에 함께 증언될 영원한 기념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과 이 여인의 헌신이 함께 기억되는 이유는, 그 사랑과 예배가 복음의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5.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한 도전을 준다. 우리는 종종 예배를 의무나 형식으로 여기거나, 계산적인 헌신 속에 갇히곤 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전 재산에 해당할 수도 있는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부음으로써, 예배란 전적인 헌신과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그녀의 행동은 우리에게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내 예배는 주님의 마음에 합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이 여인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영원히 주님 앞에 남아 있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의 헌신
1.상식을 뛰어넘은 헌신의 행동 당시 향유는 매우 귀한 것이었으며, 보통 여인의 결혼지참금이나 생계유지를 위한 중요한 재산으로 여겨졌다. 본문에서 사용된 향유는 "매우 값진 향유한 옥합"으로 묘사되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향유가 약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곧 노동자의 거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말한다(막 14:5, 요 12:5). 이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결단을 내렸으며, 이는 상식과 경제 논리를 초월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계산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막 14:3 참조).
2.이 행동은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란 계산이나 조건 없이 온전히 드리는 전적 순종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비난 속에 드러난 신앙의 순전함 여인의 행동을 본 제자들은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라며 분개하였다. 여기서 ‘허비’라는 단어는 세속적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 뒤에 있는 진심은 이 여인의 행동을 불편하게 여긴 자기중심적 시각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비난을 단호히 막으시며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여인의 동기가 순수했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사람들은 외적인 행동만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보셨고 그 순결한 신앙을 인정하셨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선제적인 행위 예수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서 함이라”고 해석하신다. 이는 당시 어떤 제자도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죽음을, 이 여인이 영적으로 직감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시신에 향 품을 바르는 전통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장례는 급하게 처리되어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다(누가 23:54–56). 이 여인의 헌신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유일한 예식이 되었고, 그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4.이 장면은 예배가 단지 과거에 대한 감사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통찰력 있는 순종임을 보여준다. 헌신의 결과는 ‘기억’이라는 영광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이 여인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동이 복음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함께 이 여인의 헌신이 전해지는 이유는, 그녀의 행동이 복음의 정신—곧 자기부정, 사랑, 헌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위대한 업적이나 이름 있는 사람만이 기억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진 헌신이 가장 깊은 기억으로 남는다.
5.오늘날 우리의 헌신은 어떤가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아름다운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예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주님께 드리는 것에 있어 계산하고 머뭇거리지는 않는가? 우리의 예배는 진정 주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과 믿음의 표현인가?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비난이 우리 헌신을 막고 있지는 않은가? 향유를 부은 여인의 순전한 마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도전한다.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헌신은 물질이나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전심과 전 생애를 드리는 것이다.
결론
베다 너에서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행동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형식이나 전통,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서 오직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녀는 계산하지 않았고, 망설이지 않았으며, 어떤 대가도 따지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언적 순종이 되었고, 복음과 함께 전파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예배를 일상적인 의무로 여기거나, 형식적 절차에 머무를 때가 있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주님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되며, 전적인 헌신과 사랑으로 표현된다. 베타니에서의 이 짧은 장면은 우리에게 예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쳐 준다. 주님 앞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자세,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믿음, 그리고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중시하는 태도—이것이야말로 베다 너에서 드러난 참된 예배의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이 여인의 순수함과 헌신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은 여전히 이런 예배자를 찾고 계시며, 그 예배는 하늘에 기억되고 땅에서도 복음과 함께 살아 역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