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비밀

by 너와나 클래스101 2025. 4. 18.
반응형

서론

세상에는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하여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한 진리가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순수한 자들에게는 드러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비밀"이며, 또 어떻게 이 비밀이 우리에게 열릴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열리는 진리의 문을 향해 함께 나아가 봅시다.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

1.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 예수님께서 직접 권능을 행하시며 복음을 전하신 고러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경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은혜 앞에 무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다,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이 탄식은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사랑의 탄식입니다.

 

2. 이방 도시 도로와 시돈 보다 더 심각한 죄 예수님은 보라 신과 벳새다를 도로와 시동과 비교하십니다. 도로와 시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악명 높은 이방 도시였지만, 만약 그곳에 동일한 권능이 나타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짧은 예화) 마치 수술을 받을 기회를 놓친 환자가, 자신의 병을 가벼이 여기다 결국 치명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을 아는 사람은 치료받고자 하지만, 병을 모르는 사람은 치료받을 기회조차 무시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3. 가버나움의 교만과 그에 따른 무서운 경고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그 자랑이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향해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심지어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소돔은 타락으로 멸망했지만, 가버나움은 은혜를 거절함으로 더 무서운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은혜를 거부하는 죄는 세상의 타락보다 더 무겁습니다. 받은 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4. 우리의 삶을 돌아보라 이 말씀은 과거 고을들만을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수없이 말씀을 듣고, 기적 같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점점 무뎌지지 않았는가? 주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 순종하고 있는가? 받은 은혜를 자랑만 하며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가? (짧은 예화 추가) 어느 부자는 매일 아침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편지를 읽기만 하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슬퍼하며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받기만 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서서히 멀어집니다.

 

5.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의 경고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회개의 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은혜를 거부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진정한 쉼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요약 정리 은혜를 무시한 죄는 세상의 타락보다 더 무겁다. 받은 은혜에는 반드시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며, 쉼을 약속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

1. 초대의 대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초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은, 강하고 성공한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이들, 자신이 지은 죄의 짐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 세상의 무거운 기대와 염려에 짓눌린 이들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단함을 아십니다. 육체의 피로만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무거움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힘내라"고 하지만,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힘을 내어 짐을 계속 지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2. 쉼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혼의 안식일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안입니다. 이 쉼은 짐이 완전히 사라져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그 짐을 지시기에 가능한 쉼입니다. (짧은 예화)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가 그 가방을 대신 들어줄 때 아이는 비로소 웃을 수 있습니다. 짐은 여전히 있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에 그 길은 가벼워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3. 예수님의 멍에: 쉽고 가벼운 짐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명령을 주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란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짐을 질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사실입니다. 왜 쉬울까요? 예수님이 짐의 무게를 함께 지시기 때문입니다. 왜 가벼울까요? 우리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삶은 고된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자유와 기쁨으로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삶입니다.

 

4. 마음이 쉼을 얻는 길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진정한 쉼은 주님을 닮아갈 때 주어집니다. 온유함은 세상의 거친 풍파 앞에서도 요동치지 않는 부드러움입니다. 겸손함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세상의 무거운 짐들이 우리를 짓누르지 못합니다. 외부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우리의 내면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짧은 예화 추가) 한 수도사가 매일 아침 무거운 돌덩이를 등에 지고 기도하러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힘들게 여겼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품 안에서 그분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 짐은 더 이상 짓누르는 무게가 되지 않습니다. 요약 정리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다. 예수님께 나아올 때 참된 쉼을 얻는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배울 때, 마음이 쉼을 얻는다.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약속

1.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쉼 사람들은 누구나 쉼을 원합니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수고하고 지치기 때문에, 우리는 쉼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쉼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휴가를 다녀와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금세 또 지치고, 좋은 소식을 들어도 잠시뿐, 마음 깊은 곳의 불안과 공허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짧은 예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공하면 참된 만족을 얻을 줄 알았고, 돈을 벌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다는 사실을. 세상의 성공이나 소유는 참된 쉼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혼 깊은 곳까지 채워지는 진짜 쉼을 약속하십니다.

 

2. "내게로 오라" — 쉼을 얻는 유일한 길 예수님은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참된 쉼은 예수님께 오는 것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법, 인간적인 위로나 오락으로도 참된 쉼은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넘어진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내게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3. 예수님이 주시는 쉼의 성격 예수님이 약속하신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그 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영혼의 깊은 평안: 외부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관계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의 내면에 진정한 안식이 임합니다. 존재의 회복: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평가나 인정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 때, 마음의 쉼을 얻습니다. (짧은 예화) 폭풍 속에서도 배가 뒤집히지 않는 것은, 배 안에 평형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도,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으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4.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라 주님은 단순히 초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직접 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조건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해져야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짐을 해결한 다음에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께 내 짐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쉼을 주십니다.

 

요약 정리 세상이 주는 쉼은 일시적이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쉼을 주신다. 참된 쉼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만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쉬게 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오늘 주님께 나아가자.

결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비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27)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열어주시는 은혜의 비밀입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 감추어지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열어주시는 신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참된 목적과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비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는 쉼을 얻고, 힘을 얻고, 생명을 누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다양한 지식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를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신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분을 알 때, 우리는 쉼을 얻고, 생명을 얻고, 영원한 비밀을 소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