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순간, 총독 빌라도 앞에 서 계실 때, 그분은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고, 논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고발과 조롱 앞에서 침묵하셨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무력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고, 그 순종은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인간의 불의 속에서도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조의 호칭 속에서, 참된 왕으로서 예수님의 권위와 겸손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침묵 속에서도 역사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순종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의 무죄와 빌라도의 손 씻음
1. 예수님의 무죄함을 분명히 인식한 빌라도 빌라도는 정치적 권력을 가진 로마의 총독이었으며,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그 어떤 범죄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은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에 대한 고발이 실제 범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빌라도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가능한 한 예수를 놓아주려고 시도했습니다.
2. 군중 심리에 휘말린 빌라도의 타협 그러나 빌라도는 정의를 실행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리의 반응을 두려워했고,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전통을 활용해 예수를 놓아줄 기회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는 바라보아와 예수를 놓고 백성들에게 선택권을 주며 간접적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했습니다(마 27:17). 하지만 군중은 이미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아 봐라 바의 석방과 예수의 십자가형을 외쳤습니다. 이 군중은 며칠 전만 해도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환영했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동일한 입술로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격한 군중 심리에 굴복하며, 정의를 저버리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3. 빌라도의 상징적인 행위: 손을 씻음 결정적인 순간에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24). 이 행동은 상징적인 ‘책임 회피’였습니다. 그는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진리를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손을 씻는 행위가 종종 무죄함을 상징했지만(신 21:6-9), 여기에서 빌라도의 행위는 외적인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손을 씻는다고 해서 양심의 책임까지 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십자가형에 넘김으로써 역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뤄진 불의의 재판 빌라도의 부당한 재판과 군중의 외침,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바라 바의 석방과 예수의 형벌—all of this—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와 불의의 집합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건들 너머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신 것은, 단지 인간들의 악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순종하신 구속 사역의 완성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인간적인 눈으로는 예수를 심문하고 판결했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 한 도구로 사용된 존재였습니다.
5. 오늘날의 빌라도 같은 사람들: 책임을 회피하는 현대의 모습 이 사건은 단순히 고대 역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빌라도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나 이익을 위해 침묵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때로 직장, 가정, 사회에서 진리를 붙들지 않고 ‘손을 씻으며’ 무책임을 합리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무죄함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손 씻음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책임 있는 반응’입니다.
예수를 넘긴 자들의 의도
1. 시기심에서 비롯된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 마태복음 27장 18절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넘긴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는 신성모독이나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으로 비난했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속 동기는 ‘시기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기적과 권능은 그들의 종교적 권위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영향력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2.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계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는 유대 사회에서 일정한 권력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성전 제도, 장로들의 전통, 그리고 율법 해석 권한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질서를 뒤흔들었고, 성전의 타락을 고발하며 정화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한 교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권력, 지위, 경제적 이익까지도 위협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의한 수단이라도 사용하여 예수를 제거하려 했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극단적 방법까지 선택했습니다.
3. 대중을 선동해 죄 없는 자를 죽이게 하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의 계획으로는 예수를 죽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퍼뜨립니다. 마태복음 27장 2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치밀하게 여론을 조작했고, 무지를 이용해 백성들이 예수님을 원망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시기심을 넘어서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선동이었으며, 그들은 백성들의 입을 통해 예수를 십자가에 넘기게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위선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동했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은 탐욕과 불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4.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악한 의도 사이의 긴장 흥미롭게도, 이 모든 인간의 악한 의도와 불의한 결정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즉, 예수님은 인간들의 시기심과 음모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 같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속의 계획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악한 의도로 움직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고, 그 십자가는 구원의 문이 되었습니다.
5. 우리 안의 숨겨진 ‘예수를 넘기는 마음’ 예수를 넘긴 자들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도 여전히 ‘예수를 넘기는 마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심, 체면, 이기심, 세상의 인정 등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불편한 진리를 밀어내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 편한 길을 택하려는 유혹이 바로 우리 안의 ‘시기심’이고 ‘기득권 지키기’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길, 채찍과 배신의 순간
1. 침묵으로 감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은 총독 빌라도 앞에 서서 여러 거짓 고발을 당하셨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놀랄 정도로 예수께서 침묵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7:14).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무대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자기희생의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분이셨고, 말씀 한마디로 자신을 변호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채찍과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고, 침묵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잠잠하였다”(사 53:7)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2. 육체적 고통의 시작: 채찍질 당하신 예수 빌라도는 군중을 달래기 위해 바라보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넘겨줍니다(마 27:26). 여기서 ‘채찍질’은 단순한 체벌이 아닙니다. 로마의 채찍은 가죽끈에 뼛조각이나 납덩이가 달려 있어, 살점이 찢기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고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채찍질은 예수님의 육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단지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한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엄청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고통과 수치를 당하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3. 배신의 절정: 군중의 외침과 바라 바의 석방 십자가로 가는 길에는 물리적 고통만 아니라 더 큰 정신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배신이었습니다. 같은 무리가 불과 며칠 전에는 예수님을 ‘호산나’로 환호했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두 사람을 내세워 군중에게 선택하게 합니다. 한 사람은 폭력과 반란의 상징은 바라보아, 다른 한 사람은 사랑과 진리의 화신인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바라보는 선택 하고, 예수님을 버립니다. 이는 인간 본성의 타락과 집단심리의 위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우리가 인생에서 반복적으로 ‘바라보아’를 선택하고 예수를 외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4. 책임 회피로 드러난 인간의 한계 빌라도는 예수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군중의 분노와 폭동을 두려워하여 정의보다는 안정을 선택합니다. 그는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진실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한 행위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예수님 홀로 지신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타락, 두려움, 배신, 침묵이 함께 엮여 있는 복합적인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 대제사장들, 군중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길은 예수님의 희생만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과 타락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5. 그러나, 이 길은 구원을 길이 된다 이처럼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배신으로 가득한 십자가의 길은, 인간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이 길이 바로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고, 채찍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신 속죄의 도구가 되었으며, 배신과 외면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가장 추한 죄가 드러나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사랑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고난의 길인 동시에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질문 앞에서도 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권력을 주장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침묵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함이었고, 포기가 아니라 구원의 결단이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지만, 예수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말씀을 멈추셨고, 억울함을 감수하셨으며,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는 진리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억울함 앞에서, 오해 앞에서, 손해 앞에서 과연 침묵하고 순종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침묵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말이 필요 없는 상황에서는 믿음으로 침묵하고, 내 뜻을 꺾어야 할 순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고통스럽고 외로울지라도, 그 길 끝에는 생명과 부활이 있음을 믿고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침묵과 순종도, 누군가에게 은혜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