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예수님께서는 단지 말씀을 전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고통받는 자들의 연약함을 친히 짊어지시며, 삶의 가장 아픈 자리에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병든 자의 몸을 어루만지시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며,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손길은 단순한 치유를 넘어서, 사람들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치유의 손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손에 닿은 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자의 길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는 단순한 감동이나 감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삶을 드리는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제자고를 향한 도전적인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손길에 치유된 자로서,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치유하시는 예수, 부르시는 예수

1. 치유하시는 예수 – 연약함에 손을 내미시는 주님 (마 8:14–1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한 여인을 보십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인해 자리에 누워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인의 존재는 큰 주목을 받기 어려운 위치였습니다. 게다가 나이 든 장모, 병든 여인—그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을 이 여인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으십니다. 말씀으로 명령하시거나 멀리서 손을 뻗은 것도 아니고, 직접 손을 만지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당시 병든 자를 만지는 것은 율법적으로 부정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시선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손길은 병을 고치는 손길이었고, 동시에 한 생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손길이었습니다.
그녀는 곧 열병에서 나아 일어나 예수께 수종 듭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고마움 이상의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자는 그저 감사만 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은혜가 삶을 변화시키고,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은혜는 결코 수동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저녁이 되자, 수많은 사람이 귀신 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한 명, 한 명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마태는 이 광경을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이 짊어지셨도다.” (사 53:4)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신기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구속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고만 있지 않고, 친히 그 고통을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복음입니다. → 적용: 오늘도 우리는 여러 가지 질병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육신의 병일 수도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손길 앞에 마음을 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길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부르시는 예수 – 따름의 대가를 요구하시는 주님 (마 8:18–22)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시려 합니다. 이 장면은 흥미롭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기를 원하고, 무리가 따르는 것을 기뻐하지만, 예수님은 무리의 관심을 피하듯 자리를 옮기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단순한 인기나 감동에 기반한 따름이 아니라, 진정한 제자의 결단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다가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다.” 얼핏 보면 감동적인 헌신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현실을 정직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안락함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안정과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조차 쉴 곳 없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 길을 따르려면, 감정적인 충동이나 순간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철저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또 한 제자가 말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요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도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장례를 금지한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 삶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도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길은 종종 우리의 ‘합리적인 사정’보다 앞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신앙생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끄시는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 적용: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마음을 다했는가? 어떤 조건을 달고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는 않았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 앞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고치시고 말씀으로 부르시다

1. 말씀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 (마 8:14–1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곧 일어나 수종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손의 접촉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의 역사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 인상적입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마 8:16) 여기서 핵심은 바로 **“말씀으로”**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특별한 도구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힘이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며 창조의 능력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어둠을 몰아내고, 병을 물리치며, 영혼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치유의 사건을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서 하신 말씀에 ‘그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이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대신 지시는 구세주이시며, 그 고통 위에 말씀으로 생명을 선포하십니다. → 적용: 우리는 오늘도 다양한 병과 상처,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올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무너진 마음과 인생을 회복시키는 줄 믿습니다.
2. 말씀으로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 (마 8:18–22) 치유의 역사 후에,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조용히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십니다. 그 순간, 두 명의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제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부드럽게 받아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그들의 중심을 꿰뚫는 도전을 주십니다. 먼저 한 서기관이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다.”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차갑게 들릴 수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그의 결단이 감정적인 충동인지, 진심 어린 헌신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부르시되, 동시에 그 말씀은 마음의 동기를 시험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제자는 말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역시 당연해 보이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강렬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 “죽은 자”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의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족보다, 장례보다, 때로는 인간적인 의무보다 앞서는 선택이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부르되,
결단을 요구합니다. 말씀은 위로일 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부르심입니다. → 적용: 오늘 우리도 말씀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인지, 아니면 그 말씀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제자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짊어지신 그분의 부르심

1.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예수님 (마 8: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은 누워 있는 병든 여인, 베드로의 장모를 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 수종들이더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진다는 것은 그 시대 율법적으로 금기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보다 사람의 고통에 더 가까이 계셨고, 그 연약함을 자신의 것으로 품으셨습니다. 곧이어 저녁이 되자, 많은 귀신 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이 예수께로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장면을 이사야서의 예언과 연결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서 하신 말씀에 ‘그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이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8:17)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친히”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보는 것이 아니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짊어지시기 전부터, 예수님의 삶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삶, 상처 입은 자들의 자리에 들어가시는 삶이었습니다. → 적용: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느낍니다. 육신의 병, 마음의 상처, 관계의 깨어짐, 삶의 무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피하지 않으시고, 친히 그 자리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울어주시는 분입니다.
2. 연약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 (마 8:18–22) 예수님 치유의 능력을 본 사람 중에는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무리가 에워싸자, 예수님은 조용히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한 서기관이 다가와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다.” 그러자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편안함이 없는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병을 고치시는 능력자이기 이전에, 세상의 안정과는 거리가 먼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제자가 요청합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먼저 이것을 하고’ 따르는 조건부 순종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선순위를 바꾸는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 적용: 주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그분이, 그 연약함을 안고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지금의 상태 그대로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고치고, 너를 이끌고, 너를 통해 일하겠다.” 그분의 부르심은 완전한 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부서지고 약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초대입니다. 치유하신 그 손으로, 이제 우리를 일으켜 제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길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상한 마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손길은 닿은 지 위로가 아닌, 회복이며 새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손으로 우리를 일으키신 주님은, 이제 그 손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이 바로 제자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은 아닙니다. 때로는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움이 있고, 때로는 세상의 가치와 부딪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주님이 함께 걸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주님의 손은 더 단단히 우리를 붙드십니다. 예수님 치유의 손길은 제자의 길로 이어집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신 그 손은, 이제 그를 부르시고 또 그를 통해 또 다른 연약한 이들을 품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말씀으로 고치시고,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치유한 인생으로 제자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